진짜 세상이란?

'키코' 가입 기업들, 환율상승으로 손실 막대... 정부 '무대책' 질타

사물해커 2008. 9. 7. 22:49
  
5일 오후 찾은 충북 진천의 한 공장. 수출을 늘어나 공장이 바쁘게 돌아가지만 이를 보는 경영진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 오마이뉴스 선대식
공장

"우르르~ 쾅쾅."

 

5일 오후 충북 진천 A사 공장 공터는 대형 건설 중장비 소리로 시끄러웠다. 수십여 대의 콘크리트 펌프트럭이 나란히 주차돼 있는 가운데, 몇몇 차량이 시험운행을 하는 듯 하늘로 뻗은 펌프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공터 한편엔 대형 타워크레인이 서 있고, 그 옆으로 대형 크레인을 조립할 때 쓰이는 구조물이 놓여 있었다. 공장에서는 고가 사다리 소방차와 함께 대형 건설 중장비를 조립하고 있었다. 지게차는 공장과 공터를 오가며 분주하게 부품들을 옮겼다.

 

회사 직원들은 최근 수주 받은 타워크레인, 콘크리트 펌프트럭 100여 대를 납기일에 맞추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습이었다. 최근 신흥 개발국 등의 건설 경기 호황으로 수출이 급증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바라보는 회사 경영진은 착잡하기만 하다. 예전 같으면 수출이 늘고, 환율까지 상승하면 즐거운 비명을 질렀지만 올해는 그렇지 못하다. 한숨만 푹 쉬고 있다. 바로 통화옵션상품인 '키코(KIKO·Knock In Knock Out)' 때문이다.

 

환율방어상품 '키코'의 놀라운 변신

 

키코는 은행에서 주로 수출 중소기업에 파는 환율방어(환헤지 또는 환율변동 대비) 상품이다. 환율이 미리 정한 상한선(Knock-in)과 하한선(Knock-out) 사이의 범위 내에서 움직일 경우, 약정 금액을 약정 환율로 팔 수 있다.

 

특히, 환율이 약정 환율과 하한선 사이에 위치할 경우, 그 환율에 산 달러를 키코를 통해 약정 환율만큼 비싸게 팔 수 있다. 환율이 하한선보다 내려갈 경우, 계약이 자동 소멸된다는 특징이 있지만, 환율이 일정 범위 안에서만 움직인다면 중소기업에 유리하다.

 

하지만 환율이 상한선을 넘어설 경우, 중소기업에 막대한 환차손을 입힌다. 중소기업은 계약한 약정 금액 2~3배를 약정 환율로 거래해야 한다. 쉽게 말해, 환율이 올라 비싸진 달러를 약정 환율로 싸게 팔아야 하기 때문에 환율이 오르면 오를수록 피해가 크다.

 

이명박 정부 들어 환율이 급등하자, 키코에 가입했던 중소기업들은 막대한 환차손을 입게 됐다. 수출 기업을 위한다는 고환율 정책이 환율 방어 상품인 키코를 환율로 중소기업 잡는 상품으로 바꿔버린 셈이 됐다.

 

"영업이익 300억 원 예상했는데, 키코 손실 최대 270억원"

 

  
9월 4일 원·달러 환율은 전날보다 19.5원 급락한 1129.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 남소연
환율

A사는 키코로 상반기에만 약 180억원의 손실을 봤다. 환율이 현 상태(1120원대)를 유지할 경우, 3/4분기엔 40~50억원의 손실이 예상된다. A사의 B 재경담당 이사는 "2008년 올해 영업이익 예상액이 300억원이었는데, 키코로만 260~270억 정도의 손실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현재 A사가 계약한 8개의 키코 상품 중 하나를 들여다보자. C은행과 계약한 이 상품은 2007년 8월에 계약한 것으로 계약기간은 2년이다. 한 달에 100만 달러까지 팔 수 있다. 약정 환율은 943원이고, 상한선은 970원, 하한선은 900원이다.

 

약정환율보다 낮은 환율을 기록했던 지난해까지는 이 상품으로 이익을 봤다. 환율이 900~920원대에서 등락한 2007년 10월의 경우, 900원에 산 달러를 943원에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8년 3월부터는 이명박 정부의 고환율 정책 등으로 환율이 급등해 상한선(970원)을 넘자, 손실이 나게 됐다. 비싸진 달러를 약정 환율 943원이라는 싼 가격에 팔아야 했다.

 

그것도 상한선을 넘길 경우, 약정 금액 100만 달러의 2배인 200만 달러를 팔아야 하는 계약 조건 때문에 손실은 더 컸다. 설상가상으로 9월 들어 달러 강세로 환율이 1100원을 넘어서자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지만 계약은 1년 더 남았다.

 

"은행이 사기꾼? 정부를 못 믿겠다"

 

"은행의 감언이설에 속았다."

 

B 이사의 말이다. 그는 "환율이 내려가면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키코를 선택한 측면이 있다"면서도 "은행이 키코 상품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한 고지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은행에 대한 불만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B 이사는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알아보니, 은행에서 돈이 궁한 중소기업에 대출을 해주면서도 강제로 키코 가입을 권유하거나, 심지어는 계약 마지막 단계에서 중소기업이 철회하려 해도 은행에서 안 해주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또한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키코 상품이 은행에 유리하고, 중소기업에 불리하다고 지적한다. 경기도 시흥 시화공단의 한 인공 피혁 제조업체인 D사는 올해 140억원의 이익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키코로 인해 100억원의 평가 손실을 올해 회계 장부에 기록해야 할 처지가 됐다.

 

이 회사 관계자는 "(환율이 하한선 이하로 내려가면 계약이 소멸되는) 은행은 손실이 제한적인 반면, 환율이 치솟으면 중소기업은 무제한적인 손실을 본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환율이 상한선을 넘어갈 경우, 은행에 달러를 싸게 매도해야 할 금액도 약정 금액의 2~3배나 되는 점도 문제다.

 

지난 4월 16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키코를 판매한 은행을 두고 "투기 세력보다 더 나쁜 세력은 지식을 악용해서 선량한 시장참가자를 오도해 돈을 버는 '에스기꾼(사기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중소기업한테 환율이 더 떨어질 것이라 권유해 수수료를 받는다"고 지적했다.

 

키코로 손실을 본 중소기업들의 모임인 '환헤지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는 지난 6월 3일 중소기업중앙회에서 '환헤지 피해대책 촉구대회'를 열고 은행들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7월 25일 "불공정거래가 아니었다"는 판단을 했다.

 

심지어 금융감독원은 8월 1일 "6월 말 기준으로 국내 기업은 키코 거래로 2조 1950억원의 평가익을 봤다"면서 "다만 투기적 거래를 한 중소기업에만 2533억원의 평가 손실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중소기업들은 "정부를 못 믿겠다, 법정에서 판단을 구하겠다"며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키코 손실의 가장 큰 이유는 고환율 정책"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3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 출석해 최근 발표한 세제개편안과 관련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남소연
강만수

키코와 관련 수출 중소기업들의 가장 큰 성토 대상은 은행이 아닌 이명박 정부다. 키코로 인한 손실 발생의 가장 큰 이유가 고환율 정책 탓이라는 게다.

 

경기도 화성의 전자부품 제조업체 E사 관계자는 "달러 약세인 상황에서 은행도, 우리도 환율이 오를지 몰랐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키코로 문제가 발생한 지 몇 달이 되도록, 정부에선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며 "8일 국회에서 열리는 '환헤지 피해대책 마련 공청회'는 민주당에서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B 이사 역시 "환율이 내려가더라도 예측이 가능하면 대처를 할 수 있다, 환율이 널뛰기하며 오르는 것보다 낫다"며 "말 한 마디로 환율이 오르락 내리락거리더니, 이제는 그 말이 시장에 안 먹힌다, 정부를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IMF 때 경제 부처 차관이었던 강만수 장관이 10년이 지난 지금 장관인데 불안하다"며 "강만수 장관이 은행을 사기꾼이라고 한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비즈니스 프렌들리 이명박 정부에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