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세상이란?

가재울뉴타운 세입자들이 '앉아서 당하지 않은 법'

사물해커 2008. 10. 5. 14:01

 

 

  
철거를 앞둔 가재울뉴타운지역의 한 골목길 풍경.
ⓒ 송주민
가재울

두 달 싸움 끝에 이주보상비 '쟁취'... '법대로' 권리 찾은 비결은?
  
가재울뉴타운4구역 재개발 조합에서 지난 9월 말께 밝힌 세입자 보상관련 안내문과 동산 이전비 신청서. 기존에 3개월치만 지급하던 주거이전비를 변경된 법에 따라 4개월분 모두를 지급하겠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 송주민
뉴타운

 

세입자들이 이겼다. 정확히 말하면 법에 보장된 이주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일대에 위치한 가재울뉴타운4구역의 세입자들은 지난 9월 말께 조합이 밝힌 '주거 및 동산이전비 보상 공고'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 달이 넘는 오랜 싸움 속에서 쟁취한 값진 성과였다.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실현하게 된 것이 뭐가 그리 대수로운 일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보상을 받은 것만으로도 신기함을 넘어 경이로운 사건이다. 적어도 재개발 지역에 거주하는 영세 세입자들에게는 말이다.

 

지금까지 개발 및 철거 지역 세입자들은 자그마한 목소리 하나 제대로 낼 수 없는 절대 약자였다. 오갈 데 없는 세입자들은 철거되는 순간까지 지역에 머물고 있다가, 조합 측이 동원한 용역직원들의 폭력과 함께 강제 추방을 당해온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최근 일부 뉴타운 개발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 세입자들의 '권리 찾기' 활동은 용역들과 맞서며 몸 하나로 생존권을 지켜가던 과거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법대로 하라"를 외치며 법 조항을 들이미는 것은 이제 조합이 아니라 세입자들 몫이 됐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하나로 모여 조합과 행정기관에 집단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것도 일상적인 일이다.

 

현재 가재울뉴타운4구역 세입자들은 '투쟁의 머리띠'를 느슨히 풀어놓고 보상비 입금을 기다리고 있다. '가재울뉴타운4구역세입자모임'의 운영자 대화명 '다사랑'은 "우리의 활동과 존재가 없었더라면 지금 같은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많은 세입자들이 잃을 뻔했던 권리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흡족함을 내비쳤다.  

 

도대체 가재울뉴타운4구역 세입자들은 어떻게 '생존을 위한 싸움'을 전개했던 것일까? 이들의 투쟁 과정과 '승리 비결'을 소개한다. 

 

[법대로 해!] '법 조항' 내밀며 권리 찾은 세입자들

 

  
'가재울뉴타운4구역세입자모임'에서 지역 곳곳에 붙인 홍보 전단의 모습.
ⓒ 송주민
가재울

세입자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관련법에 대한 '전문가'가 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세입자 대책과 관련한 법 조항을 내세우며 조합 측의 부당한 처사를 조목조목 지적해왔다.

  

그간의 '세입자 투쟁'은 극한 상황에 내몰린 세입자들의 처지를 감성에 호소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세입자대책모임의 활동은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등의 추상적인 구호를 앞세워 일반인들의 '감정적인 동조'를 끌어내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철거가 임박한 지역에는 '철거연대조직'에서 준비한 승합차와 대형 확성기에서 나오는 '투쟁가'만이 세입자들을 위로할 뿐이었다.

            

하지만 가재울4구역 세입자들은 법에 명시된 자신들의 권리를 찾아가는 것을 중심으로 전략을 세워나갔다. 항상 "법대로 처리해"를 외치던 재개발 조합을 향해 "너나 법대로 해!"라는 구호로 응수한 것이다. 세입자모임이 만든 홍보물에는 '절박한' 구호 대신 '주거이전비의 보상' 법률이나 담당 구청의 행정지도공문 등과 같은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 이번 사례에서도 조합 측은 '관행대로' 실정법을 해석해 세입자 보상을 끝마치려 했다. 지난해 4월 개정된 토지보상법에 따르면 조합은 이주를 원하는 무주택 세대주 세입자에게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4개월 치의 주거이전비(가계지출비), 동산이전비(이사비용)를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조합은 "임대아파트 입주권과 주거이전비를 모두 지급하면 중복보상"이라는 다소 자의적인 법 해석으로 세입자들에게 둘 중 하나만 제공해왔다.

 

또한 토지보상규칙 54조에 따르면 주거이전비 수혜 대상이 "정비구역지정 공람일 당시 또는 사업시행인가일 당시 당해 사업 구역 안에서 3개월 이상 거주한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조합 측은 이 법조문 중 '또는'이라는 문구가 맞지 않는다며 "'정비구역지정 공람 당시 거주한 세입자'에게만 주거이전비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다.

 

하지만 관련 법률로 무장한 세입자들은 이러한 조합 측 법률 해석의 오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옆의 이웃들이 하나둘 지역을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정당한 세입자 권리 찾기"라는 명분으로 끈질기게 버텼다. 지난 9월 18일부터는 집단적인 '이사거부운동'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두 달이 흘렀고, 조합으로서는 전처럼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었던 세입자 보상을 '법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돼 버렸다. 법률적 해석의 우위를 바탕으로 압박해오는 세입자들의 요구를 계속해서 거부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다사랑'은 이번 경험을 통해 '내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법도 돕지 못한다'는 법언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그동안 아이들 책도 못 읽어 주고 놀아주지도 못했는데 앞으로는 못해 준 것까지 한꺼번에 해 줄 생각"이라고 말했다.  

 

결국 '대충 넘어가지 않는 집요함'이 승리를 거둔 원동력이 된 것이다. 

 

[한 발 앞선 '선제공격'] 인터넷 중심으로 뭉쳐... 두 달여 만에 회원 수 200여명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개설돼 있는 '가재울뉴타운4구역세입자모임' 카페 모습.
ⓒ 송주민
가재울

 

인터넷 공간을 중심으로 한 세입자들의 발 빠른 대응도 이번 승리의 큰 요인이다.

 

세입자와 조합 간의 갈등이 정점이던 지난 두 달 동안 가재울뉴타운4구역에는 철거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거 용역'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담당 조합의 '관대함'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세입자들이 철거 이전부터 미리 '세입자모임'을 결성하고 꾸준한 대책 마련 활동을 해 왔기 때문이다.  

 

철거 시작 직전, 이주할 곳이 없는 극소수 주민이 남아 급하게 천막을 치고 용역들과 맞서며 몸 하나로 생존권을 유지해가는 모습이 철거지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하지만 가재울4구역 세입자들은 이주공고일인 8월 31일보다 한 달이 앞선 시점부터 '세입자대책모임'을 결성하고, 단결된 조직력을 바탕으로 발 빠른 대응을 해 나갔다.

 

이렇게 한 발 앞선 대응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인터넷의 힘이 컸다. 세입자들은 지난 8월 초부터 온라인상에 '가재울4구역세입자모임'(http://cafe.naver.com/gajaewul4seip) 카페를 개설하고, 주변의 세입자들을 하나로 모으는 활동을 시작했다. 불철주야로 홍보활동을 펼친 결과,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던 회원 수는 10월 초 현재 200명에 달할 정도로 불어났다.

 

많은 세입자들은 "조합으로부터 3개월 이전비만 받는 것도 감지덕지였는데 카페를 통해 우리의 정당한 권리가 침해당하고, 어려운 서민들의 돈이 떼어먹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하나둘 카페 활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디지털'로 무장한 세입자들의 폭넓은 활동이 이후 단단한 조직력을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효과적인 역할 분담] '특공조'는 지역 홍보! '민원조'는 민원 제기!

 

  
지역을 돌며 홍보 전단을 붙이고 있는 '가재울뉴타운4구역세입자모임'의 한 회원.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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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울뉴타운4구역세입자모임'에서 서울시 오세훈 시장에게 제기한 민원.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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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통해 결성된 '세입자모임'은 지난 두 달여 동안 지역 홍보 활동과 행정기관을 상대로 한 민원 제기를 꾸준히 병행해 나갔다. 이들은 일명 '특공대'(지역홍보)와 '민원팀'(민원제기)을 결성해 조직적인 대응에 나서기도 했다.

 

'특공대'는 지역 주민들에게 조합의 잘못된 보상 내역을 알리고, 지역의 세입자들을 '동지'로 끌어 모으는 것이 주 임무였다. 이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역을 돌며 홍보 전단을 붙였다. 전단에는 '주거이전비 보상'관련 법조문과 조합의 부당한 조치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세입자들은 당시 "(조합에서) 아무리 세입자들의 눈을 가려도, '특공대원'들의 작전에 주민들은 귀를 기울일 것이다"란 심정으로 '특공작전'을 행했다고 한다. 사정상 '작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세입자들도 온라인상으로나마 큰 격려를 보내며 이들의 활동을 지지했다.   

 

'민원팀'은 행정기관을 상대로 조합의 법에 어긋난 세입자 보상을 고발하는 민원 제기 활동을 벌였다. 지난 두 달여 동안, 이들이 민원을 제기한 기관은 서대문구청을 비롯하여 서울시청('서울시 오세훈에게 바란다'), 국토해양부,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신문고 등 총 5곳에 이른다.

 

해당 기관에서는 민원을 제기할 때마다 "관할 지자체에 변경된 법안대로 시행 조치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라거나 "제대로 된 세입자 보상 대책을 시행토록 행정지도를 했다"는 내용의 답변을 해왔다. 실질적인 조치는 없고, 형식적인 내용의 답변이 대부분이었지만 세입자들은 '될 때까지' 민원을 제기했다. 

 

세입자들의 적극적인 민원 제기 활동은 '꿈쩍않던' 조합을 압박하는 데 큰 무기가 됐다. 세입자들은 구청의 공문 등을 증거로 내세우며 끊임없이 조합 측에 '제대로 된 보상'을 요구했다. 결국 수세에 몰린 조합 측은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보상을 해주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조합 관계자는 "우리도 억울한 입장이지만 구청에서 계속 권고사항이 내려오고 해서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세입자들의 치열한 '권리 찾기' 활동이 '작지만 큰' 보상을 이끌어내는 데 주요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세입자모임' 운영자 '다사랑'은 지금의 성과가 자랑스러운 듯 카페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가) 뭘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 그냥 내 권리 찾으려고 한 일이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말하셔도 됩니다. '너네들(세입자들) 우리 아니었으면 절대 그 돈 못 받았을 거다!", "당신들처럼 가만히 줄 때만 기다렸다면 절대 알아서 주진 않았을 거다. 우린 선구자다!"라고요.^^"

 

[끝나지 않은 싸움] "'혁명'적 사건, 타 구역에도 전파됐으면..."

 

  
가재울뉴타운지역의 한 주택가 모습. 철거를 앞두고 어수선한 모습이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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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가재울4구역의 세입자들은 전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조합이 공지한 '보상'이 이뤄지길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도 여운이 남은 듯 "끝난 것은 아니다"는 말을 많이 한다. 조합에서 민원 제기에 의해 '등 떠밀리듯' 보상대책을 내놓긴 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시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지역을 떠나버린 50%가 넘는 세입자들이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다. 조합이 홈페이지의 한 모퉁이에 '보상 공고'를 올려놓긴 했지만, 이를 못 보고 지나치게 될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현재 응암동에 거주하는 세입자 장석철씨는 "조합 홈페이지는 포털사이트 검색에도 안 나오고, 홈페이지에 들어가도 세입자 보상 안내문이 눈에 띄지 않게 공고돼 있다"며 "몇몇 아는 분들만 입소문을 듣고 와서 보상을 신청하고 있을 뿐이지, 나머지 이사 간 분들은 제대로 보상받지 못할 확률이 높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조합 측은 변경된 토지보상법이 조합원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는 이유로 불만을 제기하고 있어, 향후 적극적인 자세로 세입자 보상에 나설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조합 관계자는 "계속 행정지도가 내려와 보상을 해주긴 해야겠지만 민간 개발에서 임대아파트 비용과 주거비를 모두 조합원들에게 떠넘기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서대문재개발연합회 차원에서 이에 대해 행정소송 등을 준비 중"이라며 '탐탁지 않은' 심정을 드러냈다.

 

  
금호뉴타운19구역의 세입자가 가재울뉴타운4구역 세입자인 장성철씨에게 보낸 쪽지. 가재울4구역의 사례를 보며 조언을 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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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입자들은 이러한 우려를 전함과 더불어 가재울4구역의 '작은 승리'가 타구역에도 전파되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직접 겪어보니 재개발 지역의 영세 세입자들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앉아서 당하는' 사례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장석철씨는 "현재 전체 뉴타운 재개발 지역에서 가재울4구역과 같은 세입자 보상 문제가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우리 지역에서 일어난 '혁명'같은 작은 변화가 선례가 돼 다시는 이런 문제로 세입자들이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08.10.05 10:59 ⓒ 2008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