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세상이란?

비명 지르는 중소기업…"돈줄이 말랐다"

사물해커 2008. 10. 13. 17:05

[위기의 한국경제, 현장을 가다 ①] 사채 끌어다 쓰기도…구조조정 이미 시작

 

  지난달 15일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본격화된 미국발 금융위기로 한국경제도 휘청거리고 있다. 주가는 떨어지고 환율은 올라, 주가와 환율이 1400선에서 만나더니, 주가와 환율이 거꾸로 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시장 참여자들의 불안 심리 때문이다. 이에 이명박 정부는 "외환보유고는 IMF때보다 27배나 많은 2400억 달러"라면서 위기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정부의 주장대로 최근 금융시장의 롤러코스터 장세는 불안감이 위기를 키우는 '자기실현적 위기'의 측면이 가능하다.
  
  하지만 불안 심리가 사그러든다고 현재 한국경제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 증상이 말끔히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실물경제 현장에서는 이미 "IMF때 보다 더 힘들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은 단기적인 미국발 금융위기 뿐 아니라 장기적인 우리 경제의 구조적 모순이 중첩돼 나타난 결과라는 점에서 '자기실현적 위기'가 아니다. 경제 전문가들은 현 상황에 대해 "위기를 인식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조언한다.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모순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편집자
  
  "은행 대출? 대출은커녕 전에 대출받은 자금 회수 요청이 안 들어오면 다행이야. 은행들이 온통 거래 기업마다 새 금리로 신규대출 다시 받으라고 난리거든. 롤오버(만기연장)는 꿈도 못 꿔. 은행이 비 올 때 우산 뺏는 건 당연한 거잖아."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반도체 검사장비를 납품하는 코스닥상장사 ㄴ회사의 김동호(가명) 부사장은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회사에 돈줄이 말랐기 때문이다.
  
  환율급등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환차손 문제는 단편적일 뿐이다. 웃으며 고객에게 대출을 권유하던 은행원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3개월짜리 어음을 당연한 듯이 건네며 서로 밝은 미래를 약속하던 거래처에서는 빨리 현금을 보내라는 독촉 전화가 하루가 멀다하고 울려온다.
  
  믿음이 사라져버렸다. 모두가 현금 마련에 사활을 걸다보니 과감하게 투자를 결정한 기업, 현금사정이 좋지 못한 기업은 도산 위기에 처했다. 이미 인력 구조조정은 일상화됐다.
  
  특히 돈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면서 절대 다수의 중소기업은 생존의 위협에 직면했다. 일부 중소기업은 은행 대출 길이 막혀 사채까지 끌어다 쓸 정도로 심각한 지경에 내몰렸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 여파가 환시장을 거쳐 한국 중소기업 현장에 대지진을 일으키고 있다.
  
  환율 급등에 정상 경영도 어려워…은행들 '키코 가입하라' 협박하기도
  
  환율 급등의 일차 부작용은 외화로 자금을 결제하는 다수 기업에 큰 환차손을 안겨주는 데서 생겨난다. 원자재 수입량이 많은 회사나 해외시장 진출을 추진 중인 회사가 특히 큰 피해를 입고 있다. 김 부사장의 회사가 대표적 사례다.
  
  이 회사는 대기업 납품업체라는 프리미엄에 해외 자원시장 개척의 사업성이 검증되면서 한때 증권시장에서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은 납품업체가 직접 해결해줘 안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김 부사장은 "죽지 않을 만큼만 이익을 주니 성장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적어도 하도급업체에 환율문제를 떠넘기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환율 급등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달러 대출을 받아 해외자원시장에 직접 투자한 자금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나버렸기 때문이다.
  
  "올해 말까지 800만 달러를 해외로 송금해야 해. 800만 달러면 예전에는 77억 원만 보내면 됐는데 지금은 120억 원이야. 이 금액 차이를 우리 같은 중소기업이 어떻게 감당해? 결국 부동산 처분해서 마련해야지. 다음 달 20일까지 현지에 가서 이 문제 결론을 내야 해."
  
  부동산 처분이라고 쉬운 게 아니다. 최근 기업들이 너도나도 현금 확보를 위해 눈에 불을 켠 상황이라 이를 인수할 주체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사업을 접을 수도 없다. 해외 자원시장 개척은 회사의 미래를 걸고 추진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인도네시아 탄광의 정밀시추를 끝내면서 사업성도 충분히 확보했다. 대기업 진출을 유도하기 위해 200억 원을 따로 들여 도로와 항만 문제까지 말끔히 정리했다. 지금 와서 사업을 접는다는 것은 회사의 영속성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환율 변동을 막기 위한 방법이 바로 환위험헤지다. 최근 그 투기적 구조와 은행과 기업 간 권력 불균형 문제가 거론되면서 큰 문제로 떠오른 키코도 환헤지상품의 하나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환율이 1200원일 때 키코 가입기업의 약 70%가 부도위험에 내몰릴 가능성이 높다. 지난 10일 기준으로 원-달러 환율은 1300원이 넘는다.
  
  그나마 김 부사장의 회사는 키코에 가입하지 않아 피해가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두고 은행과 다투다 이 회사는 거래은행을 바꿔야 할 지경에 처했다. 은행은 중소기업의 편이 아니었다.
  
  "주거래은행에서 정말 살벌하게 찾아와서 키코에 가입하라고 난리였어.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키코의 구조가 잘 이해되지 않는 거야. 자금담당 직원에게 가입하지 말라고 지시했지. 이것 때문에 은행 쪽과 얼굴까지 붉히고 싸웠다고. 오죽하면 우리 거래처 지점장이 내가 기분 나쁘게 굴었다는 이유로 회사 통장을 막아버리기까지 했겠나. 은행직원들이 이 정도로 관료적이야. 요즘에는 공무원보다 더해."
  

▲구로디지털1단지의 오후 한 때. 거리를 오가는 사람보다 벤치에 앉아 동료직원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거나 혼자 담배를 피며 생각에 잠긴 사람을 찾기가 더 쉬웠다. ⓒ프레시안

  이미 칼바람 흉흉…사채 끌어다 쓰는 회사도 많아
  
  환율급등과 해외시장 불안정으로 인해 기업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이미 기업 현장에는 칼바람이 불고 있다. 김 부사장의 회사는 그나마 탄탄해 사정이 나은 편이다. 대다수 중소기업의 경우 인력 구조조정 등 생존을 위한 비상체제에 돌입한 지 오래다. 지난 10일 <프레시안>이 찾은 구로디지털단지의 분위기는 중소기업 현장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이곳에 종사하는 직장인들의 표정은 빌딩 색만큼이나 칙칙하게 내려앉았다. 아파트형 공장 곳곳에 마련된 벤치에는 혼자 나와 심각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는 직장인의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근무하는 권혁근 이사는 쉴 새 없이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회사 안에 있기가 답답했다는 그는 벤치에 앉아 회사 자금결제 문제를 두고 곳곳에 도움을 요청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화기에 대고 그는 "(대금결제를 연장하자고) 해봤는데 캔슬 됐어", "(거래처에서) 당장 돈을 안 주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대. 어떡하느냐" 등의 말을 절박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이 회사는 단돈 1000만 원 때문에 주 거래처와 얼굴을 붉히는 지경에 처했다. 단기 자금융통이 빡빡해 지난 주말로 예정됐던 대금결제를 다음 주로 미루자고 했다가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자금 사정이 어려운 건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제위기가 수년 간 한 번도 문제가 없었던 거래처와의 관계까지 틀어놓은 셈이다.
  
▲구로디지털단지 내에는 많은 은행이 '디지털단지점' 혹은 '중소기업 대출 문의' 등의 간판을 내걸고 입점해 있다. 하지만 이들은 경제위기 상황에 중소기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사진은 특정은행과 관련이 없음). ⓒ프레시안

  은행에 찾아가서 대출을 받으면 문제가 원만하게 풀리지 않을까? 단돈 1000만 원을 기업이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권 이사는 "은행 대출은 지금 구로디지털단지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찾아가봤자 이전에 받은 대출자금 회수 독촉만 받는다. 기존 대출 연장도 꿈도 못 꾸는 상황에 새 대출을 어떻게 받냐"고 되물었다.
  
  은행대출 길이 막힌 기업 일부는 사채시장에 손을 벌리고 있다. 부작용이 우려되지만 당장 회사가 무너질지도 모를 상황에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채업체에라도 돈을 꿀 수 있으면 다행이다. 자금경색이 심화되면서 일부 사채업체마저 사업 규모를 줄이는 게 현실이다.
  
  사채업체라고 아무 중소기업에나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다. 미래 발전 가능성이 있는 회사에만 선별적으로 접근한다. 그리고 사채를 미끼로 회사 증권을 인수, 경영권을 빼앗은 뒤 되판다. 이런 일이 특히 IT업체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권 이사는 "강남에서 사업하는 내 친구가 사채를 끌어다 썼다가 경영권을 뺏겼다. 사채업체는 이 회사를 외국 기업에 팔아 차익을 남겼다. 상황이 어려워진 가운데도 이미 벤처업계 물밑에서는 구도 재편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대대적인 감원 칼바람도 분다. 권 이사의 회사 역시 10월 들어 관리직 직원 4명을 해고했다. 권 이사는 "연말까지 50명이던 관리직을 30명으로 줄일 계획이다. 안타깝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나"고 말했다.
  
  임금체불 사태도 빚어지고 있다. 구로디지털1단지에 위치한 한 공장 아래 편의점에서 동료직원과 컵라면을 먹던 ㅎ모니터 부품 제조사의 양모 대리는 "지난 달 월급을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 밥값을 아끼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회사가 언제 망할지 몰라 불안해 죽을 지경"이라고 말했다.
  
  민심이 흉흉해지다보니 구로디지털단지 내에서는 별의별 소문이 다 돈다. "연말까지 단지 입주기업 중 상당수가 도산할 것이다", "모 업체 사장이 간밤에 회사 자금을 챙겨 튀었다"는 등 소문이 빌딩 사이, 거리 곳곳을 휘젓고 다닌다.
  
  경기위축이 낳은 가장 큰 부작용은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 믿음의 단절인 듯했다. 거래처 사이에 신뢰가 깨졌다. 분위기가 나빠지자 직원들 사이에도 좋지 않은 말들이 오간다고 권 이사는 설명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연락처를 주고받던 권 이사는 최근 들어 모르는 전화번호는 받지 않게 됐다는 설명을 덧붙이며 "전화를 못 받아도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
  
"중소기업 전담부서 기능 조정 필요"
  
  
지난달 25일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제조사 154개 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발 금융위기가 장기화될 경우 감원 등을 포함한 초긴축 경영을 실시하겠다고 답한 기업이 70%였다. 지금 사태가 더 길어질 경우 중소기업 10곳 중 7곳에서 감원을 실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중소기업이 국내 고용의 88%를 담당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지금 위기가 장기화될 경우 또 다른 위기를 낳을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환율급등에 따른 키코 가입 기업의 피해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김석태 동국대 경제통상학부 교수의 시뮬레이션 추정에 따르면 환율이 1200원일 경우 키코 가입 기업의 총손실액은 2조1000억 원에 달한다.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약 900억 원의 추가 피해가 늘어나는 점을 감안할 때 지난 10일 환율 1309원을 기준으로 이미 손실액은 3조 원을 넘어섰을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 1일 금융위원회가 총 4조3000억 원에 달하는 정책자금 지원대책을 내놓는 등 정부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현장의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은행 자율에 맡기는 지원대책이 실효성을 찾기 어렵다는 이유다.
  
  특히나 사정이 열악한 2차 벤더(대기업 하청업체에 물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의 경우에는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할 공산이 크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은행에서 자본규모가 미미한 기업에 유동성 지원을 승인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동호 부사장은 "대책안이 나온 후 어떻게 상황이 흘러갈지는 안 봐도 뻔하다. 은행은 일단 작은 회사 대출은 다 걷어간 다음 건실한 기업을 중심으로 유동성을 공급할 것이다. 그러면 종업원 20~30명 정도 회사들은 곧바로 죽는다. 거기서 그치면 다행이다. 이 회사들이 무너지면 납품업체 역시 타격을 입는다"고 우려했다.
  
  이의영 군산대 경제통상학과 교수는 "한계기업과 지원이 불필요한 성숙기업 등을 분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며 "중소기업 자금지원이 수십 년 됐음에도 대단히 취약한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중소기업 전담 부서의 기능을 현실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중소기업청이 하도급 문제, 설립 초기회사 지원방안 등에 권한을 집중할 수 있도록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얘기다. 현재 정부 조직에서 관광산업, 자원산업 등 사업목적이 아니라 대상을 기준으로 조직이 만들어진 곳은 여성가족부와 중소기업청(지식경제부 산하) 두 곳뿐이다. 중소기업청 사업 영역이 불확실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이 교수는 "중소기업청이 공정거래위원회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공정위는 경쟁정책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기 때문에 다른 부처에서 공정거래 관련 정책을 만들 때는 반드시 공정위에 문의해야 한다. 중기청도 이와 같이 영향평가 기능, 지원기능 등 중소기업 특화 문제만 전담할 수 있도록 위상을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현장의 중소기업인들이 요구하는 '피부에 와 닿는 정책지원'이 이뤄지는 데도 도움이 된다. 대상과 목적이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이 교수의 주장대로 지원 기능이 조정된다면, 이번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 대책이나 키코 대책 등이 전담부서를 거쳐 보다 실효성 있게 추진될 수 있다.
  
  다만, 중소기업 전담부서의 위상을 무조건 격상시키고 보자는 식의 접근은 위험하다고 이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지금 중소기업청은 안 걸리는 정책이 없다. 중소기업청 위상 강화에는 동의하지만 그 형태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신중히 고려해야 할 문제"라고 언급했다.
   
 
   프레시안 이대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