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세상이란?

[현장] 일제 고사 거부 학생들과 보낸 하루

사물해커 2008. 10. 15. 19:24

"틀린 걸 거부하는 게 진짜 공부 아닌가요?"

  

"시험 보는 거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에요. 공부한 것을 점검하고 실력을 확인할 수 있잖아요. 근데 중간고사랑 기말고사면 충분하지 않나요. 등수를 매기며 경쟁을 부추기는 게 싫어요."
  
  야생화를 들여다보던 지수(가명·초6)의 얘기다. 지난 14일 전국 1만1080개의 초·중·고등학교에서 국가 수준 학업성취도 평가가 일제히 치러지는 동안 지수를 포함한 74명의 학생은 경기도 포천의 평강식물원으로 체험 학습을 떠났다. 이날 체험 학습은 '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 등 6개 단체로 구성된 '일제 고사에 반대하는 서울 시민 모임'이 마련했다.
  
  "부모님이 권해서 오긴 했지만… 오니까 좋다"
  
"중간고사랑 기말고사면 충분하지 않나요. 등수를 매기며 경쟁을 부추기는 게 싫어요." ⓒ프레시안

  이날 식물원에 온 아이의 대부분은 부모의 권유로 일제 고사를 거부하고 체험 학습에 참석했다. 그러나 다들 부모의 '강요'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부천에서 온 지영이(가명·초6)는 "엄마가 제안을 해서 체험 학습에 왔다"며 "학교에서 같이 오는 아이들이 없어서 심심했는데 금세 친구를 사귀었다"고 구리에서 온 혜윤이(가명·초6)를 소개했다.
  
  단짝으로 보이는 지수와 수해(가명·초6)는 "시험보는 게 싫어서 여기 왔다"고 솔직히 체험 학습 이유를 털어놓았다. 지수는 "시험 보면 등수랑 등급이 매겨지고 학교에도 등급이 매겨지는 게 싫다"고 말했다.
  
  수해는 "주변 친구 중에도 일제 고사 보기 싫어하는 친구들이 많았는데 엄마, 아빠가 허락을 안 해줘서 못 왔다"며 안타까워했다.
  
  혜윤이를 데리고 온 김희정(가명·38) 씨는 "아이가 신문 스크랩도 하고 관심 일기도 쓰면서 시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며 "아이와 대화를 통해 여기 오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가 처음엔 자기만 시험을 안 본다는 것에 대해 불안해했는데 결정이 난 이후에는 좋아했다"고 말했다.
  
  유미(가명·초6)를 데려온 신혜원(가명·41) 씨도 "체험 학습을 가라고 해도 아이가 싫다며 그냥 시험 보겠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선뜻 가겠다고 해서 놀랐다"며 "촛불 집회 때 아이가 자기 스스로 열심히 찾아보고 하더니 생각이 많아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옳지 않은 걸 안하는 것도 공부 아닌가요"
  
▲ "학교 공부도 중요하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거 아닌가요?" ⓒ프레시안

  고등학교 1학년으로 체험 학습에 참여한 지희(가명· 고1)는 평소 엄마와 사회 문제를 놓고 많은 얘기를 나눈다. 지희는 "1주일 전에 엄마랑 아빠랑 상의해서 체험 학습을 결정했다"며 "일제 고사는 학교 간 차이를 커지게 하고 교육의 양극화를 만들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똑부러지게 말했다.
  
  지희는 "학교 공부도 중요하지만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거 아니냐"며 "그렇다고 사회운동을 하려는 건 아니고 나중에 호텔조리학과에 가서 훌륭한 요리사가 되는 게 꿈"이라며 수줍게 웃었다.
  
  "교복 색깔로 못난 아이 평가되는 게 싫어"
  
  학부모들은 일제 고사 결과로 확립될 고교 정보 공개제가 더 걱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김희정 씨는 "중학교 갈 때 성적이 낮은 학교의 교복을 입고 다니면 공부 못하는 애들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거 아니냐"며 "그러면 아이들 사기가 얼마나 떨어질지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올해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가 내년에 진단평가를 볼 때는 어떻게 할지 고민"이라며 "엄마들끼리 학원이나 시험대비, 과외 문제 등을 많이 얘기하는데 학습의 질이나 학생의 정서 얘기는 잘 하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그는 "보통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시험 본다고 하면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만다"며 "초등학교 간, 그리고 반 별, 또 더 나아가 엄마들 간 경쟁이 더 심해지게 될 것 같아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상희(가명·초6)를 데려온 용산구에서 온 구연희(가명·39) 씨도 "우리 아이를 돈이 많아 좋은 교육을 받는 아이들의 들러리 쯤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공감을 표시했다. 전국학부모회의 정경희 사무국장은 "내 것만 챙기고, 내 성적만 좋으면 된다는 '개별화'된 인식이 문제"라며 "이런 생각은 21세기 글로벌 인재를 만들겠다는 정부 생각의 맹점"이라고 지적했다.
  
  "'경쟁'이 아닌 '협동'을 경험한 아이의 표정을 보라"
  
  이날 오전 이들이 체험 학습을 오려고 집결한 광화문에는 '학교를사랑하는학부모모임' 소속 회원들이 와서 "학교로 돌아가서 일제고사에 응하라"고 강요하고, 경찰이 나서기도 해 한 때 긴장감이 조성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 겁을 먹은 아이들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식물원에서 체험 학습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금세 밝은 표정이 되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구연희 씨는 말했다.
  
  "다함께 모여 친구에게 목걸이도 만들어주며 '경쟁'이 아닌 '협동'의 시간을 경험하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라. 일렬로 줄을 세우려는 어른의 욕심 때문에 일제 고사를 강요받는 전국의 수많은 아이들한테 저런 표정은 절대로 볼 수 없다."

   
 
  포천=양진비/기자